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-이탈리아 관계 (문단 편집) === 중세~근세 === [[로마 제국]]의 붕괴 이후와 [[백년전쟁]] 종결 이후 [[프랑스 왕국]]은 [[밀라노 공국]], [[나폴리 왕국]] 등 [[이탈리아 반도]]에 지속적으로 간섭하려 시도했고, 그 결과 [[이탈리아 전쟁]]이 벌어져 이탈리아 반도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. 이탈리아 전쟁은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나 [[르네상스]]를 꽃피우며 근대의 시작을 알렸던 이탈리아는 주요 전장터로 황폐화되었고, 프랑스도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간섭을 포기하면서 실익은 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]]만 거두었다. 다만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에게 점령당했던 [[사보이아 공국]]을 되찾은 [[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]] 공작은 1561년 공국의 [[공용어]]를 [[라틴어]]에서 [[이탈리아어]][* [[알프스]] 서부 [[사부아]]와 [[발레다오스타]]에서는 [[프랑스어]]를 공용어로 지정한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후술할 토리노 천도와 맞물려 이탈리아어가 사보이아 공국의 주요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.]로 바꾸었고, 2년 뒤에는 [[사부아]]의 [[샹베리]]에서 [[피에몬테]]의 [[토리노]]로 [[천도]]하면서 지금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한 [[사보이아 가문]]이 [[이탈리아인]]으로 정착했고, 사보이아 공국도 [[이탈리아/역사|이탈리아 역사]]에 전면으로 등장했다. 어떻게 보면 프랑스의 간섭이 먼 훗날 벌어진 [[이탈리아 통일]]에 큰 영향을 미친 셈. 하지만 프랑스는 사보이아 공국의 토리노 천도 이후에도 사사건건 사보이아 공국에 간섭하려 들었고, 결국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 중 벌어진 [[토리노 공방전]]에서 사보이아 공작 [[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]]와 [[합스부르크 제국|오스트리아]] 사령관이자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6촌 [[사부아 공자 외젠]]이 [[프랑스군]]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나서야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